1009년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공: 고려의 운명을 바꾼 선택

1009년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2차 침공: 고려의 운명을 바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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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 고려의 하늘에는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993년,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의 1차 침입을 막아낸 고려는 잠시 평화를 누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북방의 위협이 잠시 잦아든 사이, 수도 개경의 궁궐 안에서는 더 위험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왕실 내부의 비뚤어진 욕망과 정치적 암투는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고, 이는 결국 한 장수의 칼끝에서 시작된 정변과 40만 대군이라는 거대한 외침(外侵)을 불러오는 나비효과로 이어집니다. 오늘 이야기는 고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1009년 ‘강조의 정변’과 그 비극적 결과에 대한 기록입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제7대 목종(穆宗)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부(情夫)인 김치양(金致陽)과 함께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이들의 야망은 단순히 권력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을 목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으로 만들려는 끔찍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습니다.

흔들리는 왕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야망

이러한 상황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량원군 순(大良院君 詢, 훗날의 현종)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고, 심지어 강제로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목종은 이들의 전횡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 당시 서북면에서 거란을 막고 있던 강력한 군벌, 강조(康兆)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해달라”는 밀명을 내린 것입니다.

교과서에서는 간단히 ‘정변’으로 기록되지만, 그 이면에는 왕위를 차지하려는 어머니와 그로부터 정통 후계자를 지키려는 아들, 그리고 그 사이에 선 한 장수의 고뇌가 얽혀 있었습니다. 이는 한 편의 비극적인 궁중 사극과도 같았습니다.

“왕이 신하를 부르니, 신하가 군대를 이끌고 와 왕을 폐하다. 충심과 역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구국의 결단인가, 역심인가: 강조의 정변

왕의 부름을 받은 강조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경에 도착하기 전, “왕이 이미 김치양에게 살해당했다”는 거짓 정보가 전해집니다. 이에 격분한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궁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궁에 들어와 보니 목종은 살아있었습니다. 이미 군사를 동원해 궁을 점령한 강조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결국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현종)으로 옹립했습니다. 폐위된 목종은 유배지로 가던 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시해당하고 맙니다.

강조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왕실을 위협하던 간신을 제거하고 정통성 있는 왕을 세웠지만, 그 과정은 명백히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역모’였습니다. 그의 선택이 과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정이었는지, 아니면 권력을 탐한 역심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이 선택이 고려의 운명을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변이 부른 거대한 전쟁, 거란의 2차 침공

고려의 내부 혼란을 예의주시하던 거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는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역적 강조를 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려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010년에 시작된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 강조는 30만의 고려군을 이끌고 통주(通州)에서 거란군에 맞섰지만, 거란의 뛰어난 전술에 휘말려 대패하고 자신도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거란 황제는 사로잡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회유했지만, 강조는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라며 끝까지 저항하다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입니다. 총사령관을 잃은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거란군은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현종은 멀리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고, 고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안의 적을 베었더니 밖의 적이 강을 건너왔다. 고려의 운명은 한 장수의 칼끝에서 시작되어 거란 40만 대군의 말발굽 아래 놓였다.”

1000년 전후의 역사는 한 국가의 내부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궁중의 작은 암투가 정변을 낳고, 그 정변이 외부의 침략을 불러와 나라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이 시련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종이라는 위대한 군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끈질기게 저항했고, 훗날 귀주대첩의 대승리를 통해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위기는 때로 한 국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담금질의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요 사건 시간 순서 도표

연도주요 사건
993년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 획득
997년목종 즉위,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권력 장악 시작
1003년경김치양,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왕위 찬탈 계획
1009년강조의 정변 발생, 목종 폐위 및 시해, 현종 즉위
1010년거란 성종,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공 감행, 개경 함락
1011년고려군, 퇴각하는 거란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반격 시작
1018년거란의 3차 침입,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