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5년 흥왕사 창건, 고려 황금기의 빛과 그림자

서기 1050년, 길고 지루했던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이 흐른 고려는 마침내 상처를 회복하고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이끈 군주는 제11대 임금 문종(文宗)이었습니다. 그의 치세 아래 고려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 이 시기의 번영은 훗날 고려를 뒤흔들게 될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고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거대한 사찰 ‘흥왕사(興王寺)’의 창건을 통해 당대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조명하는 기록입니다.
문종은 고려의 역대 군주 중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는 아버지 현종이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지켜낸 나라를 물려받아, 3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사회 통합과 문화 발전을 꾀했습니다. 법률 제도가 정비되고, 국경이 안정되었으며, 경제는 풍요로웠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렸던 최충의 활약과 더불어 고려가 가장 평화롭고 번성했던 때로 기억합니다.
흥왕사, 황금기의 역량을 집대성한 대역사(大役事)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문종은 1055년,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대한 사찰을 짓기 시작합니다. 바로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흥왕사입니다. 이 절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12년에 걸쳐 완공된 흥왕사는 2,800칸에 달하는 전각과 13층 목탑을 갖춘,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과 예술적 역량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습니다. 이는 고려가 대외적으로는 송나라, 거란, 일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적인 문화 강국임을 과시하고, 대내적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기념비였습니다.
흥왕사의 건립은 교과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당시 고려의 국력을 짐작하게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불과 한 세대 만에 이토록 거대한 건축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고려의 경제적, 기술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증명합니다. 이는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방의 국경은 고요하고 창고의 곡식은 가득하니, 이는 부처의 가호 덕분이다. 마땅히 대가람을 세워 그 은혜에 보답하고 만세의 태평을 기원하노라.”
문벌 귀족, 황금기의 또 다른 얼굴
그러나 이 화려한 황금기의 이면에는 새로운 권력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문벌 귀족(門閥貴族)’입니다.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특히 문종의 왕비들을 배출한 인주 이씨(인천 이씨) 가문은 그 정점이었습니다. 이자연, 이자겸으로 이어지는 이 가문의 권세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문종의 안정적인 통치는 역설적으로 이들 문벌 귀족이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 되어주었습니다.
흥왕사 건립과 같은 대규모 국가 사업은 왕권을 과시하는 동시에, 이러한 귀족 세력의 부와 권력을 더욱 키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 사업을 주도하며 경제적 이권을 챙겼고,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에 싹튼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결국 훗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같은 거대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왕의 사위가 아니면 재상이 될 수 없고, 공신의 후예가 아니면 권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부와 권세는 대를 이어 쌓여갔고, 마침내 왕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1050년대는 고려가 역사상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강렬했던 만큼, 문벌 귀족이라는 짙은 그림자 또한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흥왕사의 거대한 탑은 고려의 자신감을 상징했지만, 그 탑의 그늘 아래서는 새로운 갈등의 역사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 속에서 이미 쇠락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역사의 아이러니와 깊은 교훈을 남겨줍니다.
주요 사건 시간 순서 도표
연도 | 주요 사건 |
---|---|
1019년 | 강감찬의 귀주대첩, 거란과의 전쟁 종식 |
1046년 | 문종 즉위 |
1055년 | 최충, ‘9재 학당’ 설립 / 흥왕사 창건 시작 |
1067년 | 흥왕사 완공 (12년 소요) |
1076년 | 경정전시과 실시 /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 출가 |
1083년 | 문종 사망 |
1126년 | 이자겸의 난 발발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폭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