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년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과 고려의 비극
서기 1280년, 30년에 걸친 몽골과의 처절한 전쟁이 끝난 고려의 땅에는 평화가 아닌 새로운 멍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즉 사위의 나라가 되어 자주성을 잃었고, 대륙을 통일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거대한 야망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몽골의 칼날을 막아내기 위해 싸웠던 고려의 아들들은 이제 그들과 나란히 서서, 원치 않는 전쟁터로 내몰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고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 동원되었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과 그 속에 담긴 백성들의 눈물에 대한 기록입니다.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해야 했고, 다루가치라 불리는 원의 관리가 파견되어 국정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마저 1273년에 진압되면서, 고려는 더 이상 원나라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륙을 제패한 쿠빌라이 칸의 시선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정동행성, 원정의 칼날을 품은 기구
쿠빌라이는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복속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을 결심하고, 그 전초기지로 고려를 지목했습니다. 1274년, 1차 원정이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쿠빌라이의 야망은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2차 원정을 위해 1280년,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특수 기구를 설치합니다. ‘동쪽을 정벌하기 위한 임시 성(省)’이라는 뜻의 이 기구는 사실상 일본 원정을 위한 총괄 본부였으며, 고려는 이 기구를 통해 원정 준비의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정동행성의 설치는 고려가 원나라의 전쟁 기지로 전락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간단히 ‘원나라의 내정간섭 기구’로 설명되지만, 그 본질은 고려의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여 일본을 치기 위한 창구였습니다. 고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황제의 야망을 위해 고려의 아들들이 이역만리 바다에서 죽어갔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백성의 눈물로 배를 만들고, 한숨으로 군량을 채우다
2차 원정의 규모는 1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에 900척에 달하는 전함을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명령은 고려 전역에 재앙과도 같았습니다. 배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산에서 나무가 베어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강제로 징집되어 배를 만드는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1만 명에 달하는 고려군이 원정군으로 차출되었고, 이들을 포함한 14만 대군의 군량과 보급품을 마련하는 것 역시 온전히 고려의 몫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장정들은 배를 만들거나 군인으로 끌려갔고, 나라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습니다. 고려의 바다는 원정을 떠나는 배들로 가득 찼지만, 그 배들은 고려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가미카제, 신의 바람인가 고려의 한숨인가
1281년, 마침내 고려군과 몽골군, 남송군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합 함대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눈앞에 둔 원정군은 또다시 거대한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하고 병사들이 수장되는 참사를 겪습니다. 일본은 이 바람을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자신들을 지켜준 기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바람은 과연 누구의 바람이었을까요.
“산의 나무는 모두 베어져 배가 되었고, 바닷가의 남자들은 모두 끌려가 뱃사공이 되었다. 남은 것은 늙은이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가 죽음의 바다를 건너야 했던 고려 병사들과, 육지에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했던 백성들의 한숨과 눈물이 모여 거대한 태풍이 된 것은 아닐까요. 일본에게는 신의 바람이었을지 몰라도, 고려에게는 수많은 아들들을 앗아간 비극의 바람이었습니다. 이 원정으로 고려는 수만 명의 인명과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입었지만,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1280년대의 일본 원정은 고려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나라를 지켜냈던 우리 선조들의 인고의 세월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주요 사건 시간 순서 도표
연도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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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 | 고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 |
1273년 | 삼별초의 항쟁 진압 |
1274년 | 제1차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실패) |
1280년 | 원나라, 제2차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 설치 |
1281년 | 제2차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태풍으로 인해 대패 |
1287년 | 충렬왕, 원나라에 직접 방문 (부마국으로서의 관계 지속) |
1294년 | 쿠빌라이 칸 사망, 일본 원정 계획 완전 중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