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년 집현전 설치 – 세종대왕과 황금시대를 연 학자들

1420년 집현전 설치, 세종대왕과 황금시대를 연 학자들

서기 1420년, 조선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피의 군주’라 불렸던 3대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그의 철권 통치는 수많은 피를 불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아들이 열어갈 시대의 튼튼한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141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젊은 군주 세종(世宗). 그는 칼이 아닌 책으로, 힘이 아닌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를 꿈꿨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1420년, 그 위대한 꿈의 산실이 되었던 ‘집현전(集賢殿)’의 설치와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세종의 시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아버지 태종을 먼저 언급해야 합니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과 공신 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심지어 아들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과 그의 가문마저 역모로 몰아 제거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피를 묻히지 않고, 오직 성군(聖君)의 길을 걷게 하려는 아버지의 냉혹하고도 치밀한 계산이었습니다. “내가 모든 악역을 맡을 테니, 주상은 만세에 빛날 성군이 되시오.” 태종이 남긴 이 유지는, 세종이 마음껏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안정을 선물했습니다.

집현전, 학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열다

안정된 왕권을 물려받은 세종은 1420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핵심 기구를 설치합니다. 바로 ‘현명한 인재들이 모인 전각’이라는 뜻의 집현전입니다. 집현전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도서관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왕의 자문 기구이자, 국가의 모든 정책과 제도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였습니다. 세종은 이곳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젊고 총명한 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등 훗날 조선의 역사를 빛낸 인물들이 바로 이 시기 집현전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세종이 이 학자들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여러 일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자들을 위해 자신의 옷을 덮어주기도 하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유급 휴가 제도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왕과 신하가 격의 없이 토론하며 나라의 미래를 설계했던 집현전의 모습은, 우리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신(君臣) 관계의 표본으로 남아있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인재를 얻는 데 있다. 뛰어난 인재 한 명이 수만 명의 군사보다 나라를 더 이롭게 할 수 있다.”

황금시대의 서막,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다

집현전은 세종 시대 모든 문화적, 과학적 성취의 산실이었습니다. 이곳의 학자들은 왕의 뜻을 받들어 농업 기술 서적인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고, 우리 실정에 맞는 법률과 예법을 정비했습니다. 또한 장영실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하여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와 같은 혁신적인 과학 기구를 발명하는 데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현전의 연구와 노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로 그 결실을 맺습니다. 세종은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이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의 글자를 만드는 것”이라며 반대하기도 했지만,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의 끈질긴 연구와 토론 끝에 1443년, 마침내 훈민정음을 완성합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애민정신)과 실용을 중시하는 정신이 결합된, 세종 시대의 철학이 집약된 결정체였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1420년 집현전의 설치는 단순히 하나의 관청이 생긴 것을 넘어, 조선이 무(武)의 시대를 끝내고 문(文)의 시대로, 야만의 시대를 넘어 문명의 시대로 나아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한 명의 위대한 군주가 품었던 비전과 그를 믿고 따랐던 젊은 학자들의 열정이 만나,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주요 사건 시간 순서 도표

연도 주요 사건
1392년 이성계, 조선 건국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태종, 권력 장악)
1418년 세종 즉위
1420년 집현전 확대 설치, 본격적인 학문 정치 시작
1429년 농사직설 편찬
1443년 훈민정음 창제
1446년 훈민정음 반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