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6년 노비안검법, 고려의 기틀을 세운 광종의 피의 개혁

956년 노비안검법, 고려의 기틀을 세운 광종의 피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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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50년,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지 1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나라였습니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의 아들들은 호족(豪族)이라 불리는 강력한 지방 세력들의 등쌀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태조가 남긴 29명의 부인과 그들의 가문은 고려의 왕권을 지탱하는 기둥인 동시에 언제든 왕을 위협할 수 있는 칼날이었습니다. 949년, 형들의 짧고 불안한 통치를 지켜보며 왕위에 오른 4대 임금 광종(光宗). 그는 훗날 ‘피의 군주’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숙청을 단행하며 고려의 기틀을 완전히 새로 짜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950년대를 관통하며 진행된 광종의 위대하고도 냉혹했던 개혁 정치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려 건국 초기는 왕권과 신권의 위태로운 공존 시대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전국의 강력한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는 ‘결혼 동맹’을 맺었고, 이는 국가 통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이들은 왕의 장인이자 외척으로서 국정에 깊이 관여하며 왕위 계승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2대 혜종은 외가 세력이 미약하여 재위 내내 왕규(王規)와 같은 강력한 호족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3대 정종 역시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호족들의 힘을 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습니다. 광종은 이러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권보다 강했던 호족, 숨을 죽인 광종

광종은 즉위 초반 7년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감춘 채, 호족 세력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조용히 힘을 길렀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당시 조정은 개국공신과 호족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섣불리 칼을 빼 들었다가는 형들처럼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7년의 침묵은 훗날 몰아칠 피바람을 예고하는 폭풍전야와도 같았습니다.

광종의 개혁 정치는 교과서에 단 몇 줄로 요약되지만, 그 이면에는 왕의 치밀한 계산과 냉혹한 결단이 숨어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고려를 호족 연합 국가가 아닌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건국 이념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혁명이었습니다.

“왕이 되려 하는 자, 힘으로 복속시키기보다 덕으로 감화시켜야 한다고들 하지만, 때로는 칼을 들어 썩은 살을 도려내지 않으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법이다.”

956년 노비안검법, 호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다

7년의 침묵을 깬 광종의 첫 번째 칼은 바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었습니다. 이 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양인(良人), 즉 평민으로 해방시켜주는 제도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적인 조치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호족 세력의 심장을 겨눈 비수였습니다. 당시 호족들의 부와 권력은 그들이 소유한 넓은 토지와 수많은 노비에서 나왔습니다. 노비는 농사를 짓는 노동력이자, 유사시에는 사병(私兵)으로 동원되는 군사력이었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한 번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또한, 노비에서 해방된 양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백성이 되므로 국가 재정은 확충되었습니다. 호족의 힘은 약화시키고 왕의 힘은 강화하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은 극심했지만, 광종은 단호했습니다. 이 법의 시행은 고려가 더 이상 호족들의 나라가 아님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958년 과거제, 새로운 충신을 등용하다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팔다리를 묶은 광종은 2년 뒤인 958년, 두 번째 칼을 빼 듭니다. 바로 중국 후주(後周) 출신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고려의 관직은 공신이나 호족의 자제들이 음서(蔭敍)라는 제도를 통해 세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능력보다는 혈연과 배경이 중시되던 사회였습니다. 과거제는 이러한 관행을 깨고, 오직 학문적 능력과 시험 성적만으로 관리를 뽑는 혁신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를 통해 광종은 호족 가문 출신이 아닌,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등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문의 배경이 아닌 오직 왕의 은혜로 관직에 오른 신진 세력이었고, 자연스럽게 왕에게 충성하며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친위세력이 되었습니다. 과거제는 고려가 귀족 사회의 한계를 넘어 실력 위주의 관료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묵은 피를 새 피로 바꾸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없다. 과거제는 왕의 손과 발이 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과정이었다.”

광종의 개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공복(관리의 등급별 옷 색깔)을 제정하여 위계를 세우고, ‘광덕(光德)’, ‘준풍(峻豊)’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한 것으로, 강력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공신과 호족들이 반역죄로 몰려 숙청당하는 피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의 냉혹한 결단 덕분에 고려는 비로소 안정된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500년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요 사건 시간 순서 도표

연도주요 사건
936년고려, 후삼국 통일
943년태조 왕건 사망, 2대 혜종 즉위
945년혜종 사망, 3대 정종 즉위
949년정종 사망, 4대 광종 즉위
956년광종, 노비안검법 시행
958년광종, 과거제 최초 시행
960년광종, 공복 제정 및 독자적 연호(광덕)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