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년, 고구려의 부활을 꿈꾼 대조영과 발해 건국

698년, 고구려의 부활을 꿈꾼 대조영과 발해 건국

7세기 후반, 한반도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수백 년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강대했던 제국의 멸망은 단순히 영토의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이자 민족적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민이 당나라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강제 이주를 당했고, 옛 영토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훗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게 될 위대한 국가, 발해를 건국한 영웅 대조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고구려 멸망과 꺼지지 않은 저항의 불씨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그들을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 등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지도층과 백성들이 이 정책의 대상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은 고달팠지만, 마음속에는 늘 고구려 재건이라는 염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의 지배하에서도 검모잠, 고연무 등이 이끄는 부흥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거대한 당나라의 힘 앞에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패는 유민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더욱 치밀하고 조직적인 저항을 준비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종종 가장 어두운 절망의 순간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틔운다. 고구려 유민들의 꺾이지 않는 의지가 바로 그 씨앗이었다.”

혼란 속 영웅의 등장, 대조영

기회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696년, 영주 지역에서 당나라의 폭정에 반발한 거란족 추장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동 지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나라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된 이 시기를, 대조영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장군 출신이었던 그는 아버지 걸걸중상, 그리고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동쪽으로의 대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위대한 여정의 서막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대조영 개인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하지만, 사실 그의 성공 뒤에는 아버지 걸걸중상의 경륜과 말갈족과의 연대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교적, 전략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천문령 전투와 발해의 건국

대조영 집단의 탈출을 인지한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즉각 추격군을 보냈습니다. 대조영의 군대는 험준한 천문령(天門嶺)에 매복하여 당나라 군대를 기다렸습니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대조영은 이 전투에서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의 추격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천문령 전투의 승리는 발해 건국의 결정적인 분수령이었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대조영은 당의 추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니, 처음 국호는 ‘진(震)’이었습니다. 이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渤海)’로 바꾸고,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으며 국제적인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의 탄생이 아니다. 그것은 고구려라는 거대한 역사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으로 당당히 그 명맥을 이어갔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사건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 발해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여겼습니다. 이는 다양한 유물과 기록을 통해 명확히 드러납니다. 발해의 온돌 문화, 기와의 형태, 불상의 양식 등은 고구려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지배층 대부분이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발해의 왕은 자신을 ‘고려 국왕(高麗國王)’이라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신생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의 영광과 정체성을 계승한 국가임을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발해는 전성기에 이르러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의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국력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남쪽의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우리 민족사가 한반도 남쪽에만 국한되지 않고, 드넓은 만주 벌판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역사였음을 증명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연도주요 사건내용
668년고구려 멸망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고 700년 역사의 고구려가 멸망함.
696년이진충의 난 발발당나라 영주 지역에서 거란족 추장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켜 요동 지역이 혼란에 빠짐.
698년천문령 전투 승리 및 발해 건국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 집단이 당나라 추격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에 ‘진(震)’을 건국함.
713년국호를 ‘발해’로 변경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으며 국호를 공식적으로 ‘발해(渤海)’로 변경함.
727년고구려 계승 의식 표명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려 국왕’이라 칭하며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명확히 함.